한 사람의 삶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 주는 것은 그가 자주 한 말이 아니라, 끝까지 붙들고 산 한 단어일지 모른다. 우리는 평소 수많은 말을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마다 다시 돌아가는 중심어가 있다.
그 단어는 생각을 넘어 삶의 태도가 되고, 선택의 기준이 되며, 마침내 그 사람 전체를 설명하는 이름이 된다.
미국의 철학자 리처드 로티는 이를 ‘마지막 단어’라고 불렀다. 죽음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자신의 삶을 움직이는 근본적인 단어,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한 삶의 좌표라는 뜻이다. 정명석 선생의 마지막 단어를 하나만 꼽으라면, 나는 주저 없이 ‘실천’이라고 말하고 싶다.
인류의 스승들은 하나같이 실천의 사람들이었다. 석가는 집착을 비우고 덕을 베푸는 삶을 살았고, 공자는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행하지 말라며 그 가르침을 몸으로 증명했다. 예수님은 인류를 위해 자신의 몸을 내어주셨다.
그들의 말이 수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 살아 있는 이유는 단 하나다. 그 말이 삶과 분리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몸으로 살아낸 진리는 시간이 흘러도 힘을 잃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그들의 삶 앞에서 마음이 움직인다.
정명석 선생 역시 말보다
먼저 삶으로 보여 준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삶을 이렇게 요약했다.
“나는 말보다 실천이다.”
이 짧은 문장은 단순한 구호가 아니라 전 생애를 관통하는 고백처럼 들린다.
실천은 선생에게 하나의 덕목이 아니었다. 그것은 철학이었고, 신앙이었으며, 삶의 방식이었다. 무엇을 믿는가보다 어떻게 움직이는가가 중요했고, 무엇을 아는가보다 어떻게 행하는가가 더 본질적이었다.
그 실천의 근원은 어디에서 왔을까. 선생은 예수님에게서 그것을 배웠다고 한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 자리에 5분 뒤 포탄이 떨어진다고 생각해라.
누군가 너를 겨누고 있다. 하나, 둘, 셋 하면 쏜다.
그 순간 살고 싶으면 모든 걸 버리고 움직여야 한다.”
이 비유에는 실천을 미루지 않는 절박함이 담겨 있다. 삶은 생각으로 돌파되지 않는다. 움직여야 산다. 선생이 평생 붙든 실천의 감각은 바로 이 절박함 속에서 단련된 것이었다.
또 한 번은 이렇게 가르쳤다고 한다. “책상 위에 물건을 올려놓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옮겨 보아라.” 아무것도 하지 않으니 일주일이 가도 물건은 그대로였다. 그러나 손으로 옮기자 단번에 자리가 바뀌었다.
그때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이같이 세상은 행해야 얻는다.” 너무 단순해서 오히려 잊기 쉬운 진리다. 알고도 움직이지 않으면, 결국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선생은 이 사실을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배웠고, 그래서 평생 고생이 되어도 행하며 살아왔다.
그래서 그의 말에는 늘 삶의 온기가 배어 있다.
“할 수 없을 때 하는 것이 진짜 하는 것이다.”
“쫓길 때 더 많이 한다.”
“안 되면 방법을 달리하라.”
이 문장들은 사색 속에서 만들어진 문장이 아니다. 현실 속에서 부딪히고,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며 체득한 고백이다. 그래서 짧은 말 하나도 가볍지 않다. 그 뒤에는 실제로 견뎌 낸 시간과 몸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선생은 실천을 ‘체질’의 문제로까지 끌어올렸다. 마음이 어떤 것을 원하게 하려면, 그에 맞는 몸의 체질과 마음의 체질을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좋은 것은 저절로 체질이 되지 않는다.
새벽기도도 전도도 운동도 반복하고, 훈련하고, 길들여야 비로소 자기 것이 된다. 반대로 편한 것과 즉각적인 즐거움은 순식간에 습관이 된다.
그래서 선생은 좋은 것은 훈련해서 체질로 만들고 나쁜 것은 훈련해서 끊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지점에서 실천은 단순한 행동이 아니다. 그것은 태도이며, 결국 체질이 된다.
또한 그는 목적을 정하고 반복해야 한다고 말했다. 목적 없이 살면 사람은 멈춰 있게 된다. 그러나 언제까지 무엇을 하겠다고 정하고 계속 행하면 변화가 일어난다.
막연한 결심은 사람을 바꾸지 못한다. 반복이 사람을 바꾼다. 넘어져도 다시 하는 그 과정 속에서, 몸과 마음은 조금씩 새로운 방향으로 길들여진다.
이런 정신은 선생의 현재 삶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가야 할 길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고 나는 매일 뛴다.”
걱정과 근심이 먹장구름처럼 몰려와도
운명을 하나님께 맡기고 뛴다는 이 고백에는
실천하는 사람만이 아는 외로움과 결기가 담겨 있다.
길이 분명해서 가는 것이 아니라, 가야 하기에 가는 사람. 결과를 다 알아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맡기고 움직이는 사람. 그래서 선생에게 실천은 상황이 좋을 때만 드러나는 미덕이 아니다. 오히려 앞이 보이지 않을 때 더 선명해지는 삶의 방식이며 신앙의 방식이다.
나는 여기서 다시 묻게 된다. 왜 실천은 사람을 감동시키는가?
사람은 말이 아니라 행동에서 진심을 느끼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사상도 삶이 받쳐 주지 않으면 오래 남지 못한다.
그러나 삶으로 증명된 한마디는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다. 선생의 실천이 울림을 주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는 실천을 말한 것이 아니라, 실천으로 자신의 말을 증명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모습은 우리에게 조용히 묻는다.
지금 나는 무엇을 알고만 있는가?
무엇을 미루고 있는가?
무엇을 체질로 만들고, 무엇을 끊어야 하는가?
실천은 거대한 결심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오늘 한 번 움직이는 데서 시작된다. 작은 순종 하나, 작은 결단 하나, 작은 반복 하나. 그것들이 쌓여 결국 한 사람의 체질을 만들고 삶의 방향을 바꾼다.
월명동 자연성전이 다섯 번 무너져도 다시 돌을 들었던 마음 역시, 멈추지 않는 실천에서 나왔을 것이다. 돌은 무너졌어도, 그의 마음은 무너지지 않았다.
한 사람의 마지막 단어는 죽기 전에 남긴 말이 아니라, 살아 있는 동안 끝까지 놓지 않은 삶의 방식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명석 선생의 마지막 단어는 분명하다. 실천이다.
생각에 머물지 않고 몸을 움직이는 것.
결심에서 멈추지 않고 체질이 될 때까지 반복하는 것.
결과를 다 알지 못해도 하나님께 맡기고
오늘 해야 할 것을 하는 것.
선생은 그 길을 걸어왔다.
그래서 그의 삶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세상을 바꾸는 힘은 거대한 말이 아니라, 오늘의 실천에 있다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