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 년의 수도 생활, “나의 스승은 오직 예수님”
정명석 목사는 1945년 충남 금산에서 태어나 10대 시절부터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기 시작했습니다. 집 주변인 월명동 골짜기와 대둔산 용문골 등에서 깊은 기도 가운데 영으로 나타나신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성경 말씀을 20년 넘도록 배웠습니다. 그 가운데 혹독한 추위와 쓰라린 배고픔을 견디는 수도 생활은 피할 수 없는 과정이었습니다.
대한민국 남자라면 당연한 군 복무 중이던 20대 초반 시절, 정명석 목사는 하나님의 이끄심에 따라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습니다. 생사의 경계를 넘나드는 참혹한 전장 한복판에서도 ‘생명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절대적으로 지켰습니다. 전장가운데 예수님의 말씀을 배우고 실천하는 길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정 목사는 줄곧 변함없이 “나의 스승은 오직 예수님”이라고 외쳐왔습니다. 예수님을 진실로 사랑하며 ‘영적 신부’로서 조건을 세우면서 예수님께 말씀을 배웠습니다. 영으로 그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은 “오늘은 창피하지만 배우고, 내일은 과분하지만 선생의 선생을 가르치는 선생이 되어라. 내게 배워서 너도 선생이 되어라” 고 말씀하셨다고 전해집니다.
수도 생활을 한 지 20여 년이 지난 1978년 5월 23일, 예수님께서는 “내가 네게 가르친 것을 모두 가르쳐 주라”는 감동을 주었고, 정 목사는 그동안 배운 새로운 예수님의 말씀을 본격적으로 전하기 위해 고향 월명동을 떠나 서울로 향했습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때에 맞춰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예수님의 이끄심을 따라 6월 1일 전에 서울에 도착했습니다.
원래 정 목사는 그가 배운 말씀을 고향인 금산이나 진산에서 전하고자 했으나, 예수님께서는 “서울은 정치·경제·학문·종교의 핵심지로서 젊은이들이 모여드는 ‘복음의 핵심지’다. 여기서 말씀을 크게 전하며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어야 한다”며 인식을 바꾸어 주셨습니다.

교리 핵심 정리한 ‘30개론 도표’를 메고 서울로 향하다
정명석 목사는 서울로 떠나기 전, 수도 생활을 통해 배운 30개론 도표를 제작해 끈을 달아 어깨에 매었습니다. 가방에는 ‘30개론 축소판 도표’와 이를 보여 줄 ‘슬라이드 영사기’를 넣고 길을 떠났습니다. 정 목사는 당시를 “<도표>는 마치 ‘시대를 살리는 양식’ 같았고, <슬라이드>는 ‘원격 조종 레이더’, <가방>은 하늘의 비밀이 들어 있는 ‘실탄 통’ 같았다”고 회고합니다.
정 목사는 서울에 가기 전 천안에서 일주일간 머물며 배방산에서 극적인 기도 조건을 쌓고, 5월 31일 서울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이튿날인 6월 1일, 이 시대를 향한 새로운 복음의 서막을 조용히 열었습니다. 기독교복음선교회에서는 현재 이날을 ‘알파날’로 정해 기념하고 있습니다. 이는 지난 시련을 딛고 시대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며, 이 땅 가운데 하나님의 뜻이 이뤄질 수 있도록 몸부림쳤던 정 목사의 생명 사랑 정신을 기리기 위함입니다.

1978년 6월 1일, 복음 전파의 첫 발을 내딛다
1978년 5월 31일 밤, 정명석 목사는 서울 신대방동의 한 교수 아파트에 도착했습니다. 상경 길에 우연히 만난 두 청년 중 한 명의 형 집에서 하룻밤을 머문 뒤 6월 1일 아침, 복음 전파의 첫 발을 내디뎠습니다. 이튿날 그 집의 초등학생 자녀가 갑작스러운 두통과 고열을 호소했는데, 정 목사가 기도해 주자 아이의 증세가 깨끗이 호전되었습니다. 이 일로 가족들은 놀라워하며 정 목사를 3일간 더 머물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이후 삼각산으로 거처를 옮기신 정 목사는 비가 많이 오는 우기에도 한 평 남짓한 비닐 천막을 치고 생활하며 기도를 이어갔습니다. 지독한 가난과 추위 속에서 전도 활동은 1년 가까이 계속되었습니다. 고된 생활을 견디지 못해 떠나는 제자들을 보내면서도 복음 전파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삶아준 라면이 식어 한 덩어리가 된 뒤에야 거처에 도착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정 목사는 삼각산에서 종로, 행당동, 성북구로 이어가며 복음을 전했고, 기도로 아픈 사람들을 치유하며 복음의 터전을 다져 나갔습니다. 그러던 중 한 암 환자가 치유되는 역사가 일어났고, 그가 감사의 표시로 전한 정성으로 1980년 3월 남가좌동에 첫 교회를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그곳에서 정신질환자를 고쳐준 인연을 통해, 정 목사의 어머니가 팔려고 했던 고향 월명동 생가터를 매입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알지 못했으나,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자연성전을 건축할 핵심지를 지킨 순간이었습니다.
당시 남가좌동 교회에서 정 목사는 공식적인 직분이 없는 평신도 신분이었기에, 목회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단상에 서지 못하는 등 가슴 아픈 서러움을 겪기도 했습니다. 결국 교회를 다른 이에게 맡기게 되었고, 정 목사는 몇십만 원만을 가지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며 다시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섰습니다.
대학생들 사이에 일어난 새 시대 말씀의 반향
1980년 8월, 정명석 목사는 서울 신촌 이화여대 앞 좁은 문간방을 얻어 다시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대학가는 젊은이들의 민주화 열망과 이념 논쟁이 치열하던 시기였습니다. 목사님은 신촌 지역에서 1 대 1 전도를 중심으로 선교를 해나갔습니다. 기성 기독교의 문자주의적 교리를 넘어 성경을 이치에 맞고 과학적으로 풀어낸 말씀은 진리에 갈증을 느끼던 수많은 젊은이의 마음을 파고들었습니다. 정 목사가 상경한 이후 처음 3년간의 과도기를 지나, 이때부터 본격적인 전도가 이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1980년 10월에는 성북구 삼선교 지역의 사회복지 기관 건물로 옮겨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철거 직전의 낡은 건물이었지만, 밤낮으로 대학생들이 모여들어 말씀을 배웠습니다. 좁은 방에 사람들이 가득 차 정 목사가 벽장 속에 들어가 강의를 해야 할 정도였습니다. 이때 말씀을 통해 삶의 의미를 찾은 대학생과 젊은 직장인들은 우리 선교회의 초석이 된 신앙 지도자들이 되었으며, 현재까지도 중직자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1987년부터 시작된 전국적·폭발적 선교의 역사
삼선교에서 복음의 불길이 타오르며 교인들이 늘어나자, 1982년 혜화동 테멘 소극장을 거쳐 5월에는 영동 지하실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예배를 단독으로 드릴 수 있는 공간과 정 목사님의 거처가 마련되면서 본격적인 선교회 체제가 갖추어지기 시작했습니다.
1983년 6월 세검정으로 교회를 옮기며 국내 지방 개척과 해외 선교의 역사가 본격화되었습니다. 1986년에는 ‘예수교 대한 감리회 진리측’이란 독립 교단으로 정식 등록되었으며, 1987년 낙성대로 교회를 이전하고 지방 개척이 활발히 이뤄지면서 전국적으로 폭발적인 선교의 역사가 이루어졌습니다.
![기독교복음선교회, ‘알파날’ 47주년 기념행사 개최 [보도자료]](https://cgmnewsroom.com/wp-content/uploads/2026/03/기독교복음선교회-‘알파날-47주년-기념행사-개최-보도자료-2026-03-1024x767.webp)
새 시대 복음의 중심지, ‘월명동 자연성전’
정명석 목사는 진리를 찾아 몰려오는 사람들이 제약 없이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영광 돌릴 수 있는 곳을 찾던 중 월명동으로 눈길을 돌리게 됐습니다. 1991년부터 하나님의 구상에 따라 제자들과 함께 월명동을 개발하기 시작했습니다.
정 목사는 국내외의 바쁜 일정을 소화하면서도 1998년 5월, 6번의 도전 끝에 자연성전의 핵심인 야심작 돌조경을 완공했습니다. 이후 월명동은 세계 각국 성도들이 찾아오는 신앙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이를 기점으로 복음은 아시아를 넘어 유럽, 미주, 아프리카까지 뻗어 나갔습니다. 1978년 홀로 뿌린 씨앗은 2026년 현재, 세계 77개국 수십만 명이 함께하는 글로벌 선교 단체로 성장했습니다.
기독교복음선교회는 오는 2026년 6월 창립 48주년을 맞이합니다. 한 사람이 뿌린 복음의 씨앗이 결실을 맺어 거목으로 성장했고, 수십만 명의 세계인이 진리의 말씀으로 하나 되는 기적을 이뤘습니다. 정명석 목사가 이끈 선교회의 발자취는 단순한 종교 운동을 넘어, 새 시대 하나님의 섭리 역사라는 큰 획을 긋고 있습니다. 정 목사가 전한 복음의 불은 온갖 시련을 뛰어넘어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활화산처럼 타오르며 수많은 생명을 옳은 길로 인도하고 있습니다.
